
[내용]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스트레스에 관한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다.
연구진은 같은 환경에서 양육된 실험용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 한 집단에는 2분마다 전기 충격을 주고, 또 다른 집단은 유리창 건너편에서 맞은 편 쥐를 관찰하도록 배치했다.
열여섯 시간 동안 실험을 진행하며 쥐들은 480회의 전기 충격을 받았는데, 쥐들의 아우슈비츠 현장에서 발견한 놀라운 점은 직접 고통을 받은 쥐가 아닌, 고통을 관찰한 쥐가 스트레스로 먼저 탈진했다는 사실이었다.
유리창 너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꼈고,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무력감을 느낀 것이다.
과거보다 월등히 많은 사람이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기분 장애에 시달린다. 많은 학자들은 그 원인 중 하나를 현대사회의 불확실성으로 설명한다.
(중략)
과거보다 더 많은 이가 불안에 잠기고 기분장애에 시달리는 이유는 너무 많은 소란을 확인하며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 너무 많은 정보는 우리의 마음을 예민하게 만들고 실제적인 위협에 대처하기도 전에 불안에 탈진하게 한다.
(중략)
뉴스를 보며 불안을 키워가고 있다면, 실시간 이슈를 확인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면, 고개를 들고 시선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으로 물드는 법이다.
- <불안 금지> 중에서
[감상]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는 관계에 관한 책이다. 작가는 인간관계에서 균형을 찾고,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살면서 내가 했던 고민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어 약간 신기해하며(?) 읽었다.
작가는 "우리 사회는 포기하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며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비장하고도 결연한 의지를 독려하곤 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여기서도 못 버티면 다른 데서는 더 못 버틴다"라는 확신에 찬 말들로, 포기는 의지가 약한 것이라며 방황을 부끄러운 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첫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 내가 스스로에게 늘 세뇌시키던 문장이 바로 저 문장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독려(?)해서 생각보다 꽤 긴 기간을 버텼는데 그 결단이 현명한 것이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불안 금지>의 쥐 실험을 읽으면서는 쥐들마저(?) 현재의 나와 비슷한 감정을 겪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가급적 인터넷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 중인데 자극적인 뉴스에 악플들까지 보고 나면 아무리 내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정신이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내면의) 균형을 갖기란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힘든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아쉬운 쪽이 덜 아쉬운 쪽에게(혹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춰줄 수 밖에 없고 그 안에서 나답게 행동하기란 꽤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관계에 관한 글보다는 "삶에는 의미도, 목적도, 보상도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는 날에는 살아낸다는 것, 그 자체가 의미이며 목적이자, 보상 아니었을까"라는 문장이 가장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작년에 이어 두번 째 읽었는데 작년에는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현재 무기력증을 앓는 중이라 저 문장이 눈에 들어왔나보다.
내년에는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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