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
우리 시민들이 매우 빠르게, 심지어 공공연하게 이 유배 기간의 끝을 가늠해 보기를 포기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 그랬냐면, 어느 날 가장 지독한 비관론자가 소멸 시효를 6개월로 잡고, 이 막막한 6개월의 아픔을 미리 각오하고 밤낮으로 온 힘을 다해 악착같이 버텨냈는데, 번뜩하는 혜안 등이 "대체 무슨 근거로 6개월이지? 왜 1년이 아니고? 1년이 훌쩍 넘을 수도 있는데?" 하는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용기, 의지, 인내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서, 자신들은 앞으로 다시는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낙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해방될 날짜를 세 보지 않았고 더 이상 미래를 쳐다보지 않고 항상 제 발 밑만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심연과 절정의 중간에서 좌초되어, 산다기보다는 부유했다. 방향 없는 날들과 쓸데없는 추억에 내던져져, 고통의 흙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방황하는 망령들이었다.
때는 1940년대, 프랑스 오랑주.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베르 리외는 진료실을 나오다가 계단 중간에서 죽은 쥐를 밟았다. 4월 18일에는 공장들과 창고들에서 쥐의 사체들이 수백 마리씩 쏟아져나왔고 28일에는 최소 8천 마리가 발견되어 소각되었다.
얼마 후, 쥐는 사라졌지만 고열과 서혜부 부위 염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다 사망하는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끔찍한 악취를 풍기며 죽어갔는데 리외의 동료 의사 카스텔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이 증상들이 '페스트'라고 확신했다. 리외 역시 동의했다.
오랑주는 격리조치에 들어갔다. 오랑주 안에 있는 이상, 주민은 물론이고 여행객이나 출장차 온 비즈니스맨들도 이 전염병이 가라앉기 전에는 아무도 오랑주를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감상]
페스트가 퍼지고 종식되기까지 몇 달 간의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적은 소설로, 주로 페스트를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와 심리 상태를 그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장면 중 하나는 도지사와 의사들이 모여 전염병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장면이었다.
위원회에서 카스텔이 '페스트'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리외를 제외한 의사들과 도지사는 그 단어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만큼 그 단어가 주는 파급력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의사들은 당장 도지사가 어떤 조치를 내려주길 바랐지만 도지사는 먼저 의사들이 이 증상이 '페스트'라고 공인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의사들은 페스트라는 게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쪽과 당장 무슨 조치든 취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어 좀처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다.
일견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페스트라는 단어가 가져올 파장을 고려하면 모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위원회 소집 후 당국은 시민들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증상들이 대단치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시작하는 공고문을 내놓는다. 그리고 추가로 시민들에게 몇 가지 예방조치를 취해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일일 사망자가 30명을 넘으면서 도시는 결국 폐쇄조치에 들어간다.
이 폐쇄조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역시 제각각이다. 출장차 오랑주에 왔다가 졸지에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된 기자는 어떻게든 오랑주를 빠져나가려고 불법 거래까지 한다. 그와 달리 도시의 폐쇄조치가 길게 이어지길 바라는 이도 있다. 그는 페스트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인데 다시 도시의 관문이 열릴 수도 있다는 소식에 초조해하기까지 한다.
전염병의 제일선에 있는 리외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도시가 폐쇄조치에 들어가기 전 투병 중인 아내를 요양원으로 보냈는데 통신의 마비로 제때에 아내의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에 대해 어떤 불만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의사로서 환자들에게 격리 선언을 할때마다 그 가족들에게서 비난을 들어야 했는데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감수한다. 오랑주를 탈출하려는 기자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느 정도 이해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이는데 이에 대해 기자가 왜 자신을 막지 않냐고 묻자 행복을 택한 선택이기 때문에 자신이 반대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리외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도시의 일상을 축복하는 사람들의 환희를 들으며 역사를 통해 이런 일은 반복되어왔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도 앞선 연대기들처럼 이 전염병 기간에 일어난 일들과 그에 맞춰 수행했던 일들, 그리고 공포에 맞선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한다.
결말은 허무했지만 '전염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때문에 흥미로웠던 책이다. 도시의 폐쇄상태가 오래 지속되길 바라던 사람이 특히 눈길을 끌었는데 그는 자신은 결코 페스트에 걸릴 리가 없다는 듯 폐쇄상태를 즐기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이 회복된 후 그가 한 일로 보건대 그 전염병이 모두에게 교훈을 준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리외만 너무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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